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간만에 옛날 영화를 보게 되었다.
프라이멀 피어는 1996년도에 개봉한 영화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을 기준으로 무려 26년전에 개봉한 영화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는데.. 26년전이면 얼마나 오래된 영화던가.
난 개인적으로 오래된 영화를 보는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봤었다.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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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게 웬걸..
거의 식스센스급 반전이 있는 영화였다.
사실 영화 식스센스도 엄마가 이미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 라는 스포를 해버려서 아직까지 보지 않고 있는 대표적인 영화중 하나였는데... 이 영화는 재수가 좋게도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봤다!!
1. 줄거리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시카고 내에서 존경받던 대주교가 잔인하게 살해된채 발견이 되고, 그 용의자로 19살의 소년 애런이 붙잡히게 된다. 하지만 애런은 본인이 죽이지 않았다며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고, 그를 변호하기 위해 변호사 마틴 베일이 나서게 된다. 베일은 계속해서 제3자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애런이 결백함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수사과정 도중, 애런이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로 인해 로이라는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낸 다중인격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미 제3자가 있다는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에 이제와서 다중인격장애를 갖고 있다고 말을 바꾸기 어려운 상황. 베일은 자신의 옛 연인이자 동료였던 여검사 베너블을 이용해 애런이 다중인격장애임을 재판 도중 증명해낸다.
미국의 법에 따르면, 다중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범죄자는 무죄로 풀려나고, 정신병원에서 상담 및 치료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애런 역시 무죄로 풀려나게 되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애런은 베일에게 자신은 다중인격 장애가 아니었으며, 애초에 애런과 로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다중인격 장애는 모두 무죄를 받기 위한 애런의 연기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2. 연기에 대한 평가
네이버 영화평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이 영화는 노턴에서 시작해서 노턴으로 끝난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애런 역을 연기한 에드워드 노턴은 primal fear가 데뷔작이었다고 하는데, 정말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연기 실력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베일을 비웃는 노턴의 연기는 대단했다.
위에 사진만 봐도 착한 애런을 연기할때의 노턴의 눈빛이 얼마나 선한지를 알 수 있다. 원래 초창기 대본에는 애런이 말을 더듬는다는 설정이 없었는데, 둘의 차이를 더 근명하게 구분하기 위해 노턴이 추가적으로 넣은 설정이라고 한다. (없었으면 크게 아쉬웠을 설정이다. 말을 더듬으로써 애런의 찐따스러움(?)이 더욱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노턴이 특히 더 대단한 이유는, 프라이멀 피어 이전에는 이중인격을 다루는 영화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중인격이면서, 알고보니 다중인격이 아니었다... 라는 소재의 반전 영화는 더더욱 없었고 말이다.
이렇게 노턴의 천재적인 연기력에 전세계가 열광했다. 노턴은 자신의 데뷔작이었던 프라이얼 피어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배우로써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다는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인데 그것도 데뷔작으로 오른다니... 이런게 천재 배우가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면 내가 고3 겨울방학때 젤 재밌게 봤던 드라마 마우스 또한 프라이멀 피어와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는것 같았다. 물론 이승기가 다중인격을 연기했던 것은 아니지만 싸패면서 선한 척 연기를 했고... 뭐 악한 본모습을 숨기고 선한 척 연기하는거..?가 비슷한 맥락인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난 이런 범죄 영화나 드라마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오늘도 다시금 느꼈다.
3. 영화에 대한 평가
이번 영화가 좋았던점 중에 하나는, 영화를 볼 때 당시에는 잘 모르겠는데 다 보고 난 뒤에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성선설'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즉, 성악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아님 악하게 태어났을까?
영화속에서 베일이 재판에서 질것을 예감하고 술을 마시던 도중 한 기자에게 자신이 악한 범죄자들을 변호해주는 이유에 대해 얘기한다. 그 이유는 베일이 성선설을 믿기 때문. 베일은 세상에 나쁘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믿으며, 아무리 나쁜짓을 저지른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베일의 생각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듯 완전한 악에 가까운 애런에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 당시 베일은 얼마나 큰 공포감을 느꼈을까. 자신의 실수로 미쳐날뛰는 악인을 사회에 다시 풀어준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난다면, 그때 베일이 느낄 죄책감이란 이로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던지는 의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과연 선하게 태어났을까, 아님 악하게 태어났지만 사회에 의해 선한 행동을 학습하게 된 것일까.
어렸을 때 도덕책에서 성선설과 성악설을 본 기억이 문득 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당연하게 성선설을 믿었다. 인간은 모두 선하게 태어났고, 어떠한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끔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생명과학을 공부하면서 그러한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이기적으로 태어난다.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존의 본능으로써 어찌보면 당연한 진화의 산물이다. 물론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절대 나쁘다고 얘기할 순 없다. 이것만으로 '악'을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남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어떠한 도덕적인 가치들은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학습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성선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본디 아기때 인간의 본능과 본성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과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에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들만 보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결코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숨길 뿐.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훌륭했으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영화를 다 보고난 뒤 혼자서 할만한 생각거리를 던져준 영화 같아서 정말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